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니발 바르카 (문단 편집) ==== 이탈리아 원정 ==== 로마는 [[선전포고]] 후 빠르게 전쟁 태세에 돌입했다. 로마는 신속히 정예 군단을 [[시칠리아]]와 [[프랑스]] 남부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로마는 외교적인 술책도 사용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 남부에 있는 부족들과 한니발의 예상 이동 경로에 있는 갈리아 부족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군툼의 함락이 로마에 대한 불신을 낳았기 때문이다.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로마 사절단을 쫓아냈다. 갈리아 부족들은 로마를 본래부터 불신하고 있어서 더욱 비협조적이었다. 당시 로마가 북이탈리아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갈리아와 로마의 갈등은 한참 고조되어 있었다. 한니발도 본격적으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움직임을 개시했다. 그는 9만 이상의 카르타고 정예 병력 중 절반을 로마 원정을 위해 징발했다. 이는 보병 3만 8천, 기병 8천, 코끼리 37마리에 해당하는 대병력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피레네 산맥으로 향했다. 한니발의 북상 소식은 로마에 알려졌고 로마 정부는 놀라며 즉시 두 [[집정관]]인 스키피오와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각각 [[갈리아]]와 [[시칠리아]]로 보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첩자를 풀어 한니발의 북상 경로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를 눈치채고 갈리아 내부로 깊숙이 이동하여 스키피오의 추적을 피했다. 이후 한니발은 그 유명한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알프스 산맥 행군을 감행했다]]. 하지만 고립된 적진에서 대병력을 이끌고 험준한 산맥을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도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한니발은 성공했다."'''라며 [[러시아 원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물론 한니발이 최초로 알프스를 넘은 것은 아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켈트족]]은 상시로 [[알프스]]를 그냥 드나들었다.] [[알프스 산맥]]은 매우 험준한 데다 당시 한니발이 [[행군]]했던 시기는 초겨울이라서 추위도 심했다. 더욱이 알프스 산맥의 원주민들도 카르타고군을 적대했다. 이러다 보니 한니발은 그곳의 비우호적인 부족들과도 일일이 싸워나가야 했다. 갈리아족은 론 강에서 일대 공격을 해왔고, 한니발은 이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알프스 산맥의 갈리아족들이 한니발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들은 수백 명을 동원해 좁은 길을 막고, 산을 오르는 카르타고군에 바위와 통나무를 굴려댔다. 갈리아족을 맞아 카르타고군은 끊임없이 그들을 격파했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험난한 원정으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과 만나기도 전부터 엄청난 고생을 했다. 특히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으면서 무려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는데, [[보병]] 3만 8천은 2만으로, [[기병]] 8천 기는 6천 기로 줄어 있었으며 밧줄로 묶어 끌어올리는 등 온갖 고생을 해가면서 끌고 온 [[전투 코끼리]] 37마리도 대거 폐사했다. 그래서 소수의 코끼리로는 제대로 된 전술적 운용을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나중에 [[트레비아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코끼리들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이마저 소실된다. 마지막 남은 코끼리 1마리는 그 뒤 한니발이 타고 다녔다.] 어쨌든 한니발은 등정 9일 만에 정상에 올랐고, 이틀 정도 군사들을 휴식시킨 뒤 하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하산에는 훨씬 더 어려운 산행을 하여 내려오는 데만 15일이 걸려서 산을 내려와 마침내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다. 북이탈리아에 당도하자 그곳의 갈리아 부족들은 알프스의 갈리아 부족들과 달리 한니발을 환영했다. 이들은 로마의 정복에 맞서 싸우고 있는 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한니발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한니발의 병력은 3만여 명에 불과해서 결코 많다고 볼 수 없었고 과연 동맹을 맺을만큼 강한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니발은 이 지역 부족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곧 [[집정관]] 스키피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이다.]가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나섰으나 실패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음을 뒤늦게 눈치채고 마실리아[* 현 [[마르세유]]]에서 북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는 타키누스에서 한니발과 기병전을 벌였다. 이는 로마 정규군과 한니발군의 첫번째 싸움이었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로마군 기병대는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대에 완패하고 스키피오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 기록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포위되었으나 그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승리하자 [[갈리아인]]들은 의심을 거두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로 한니발은 갈리아족들로부터 원활한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스키피오는 전투에서 패전하고 중상을 입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한니발을 눈앞에 두고서도 자신의 진영에 틀어박혀 치료에만 전념해야 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무력화되었음을 확인하자 점령과 약탈 활동을 급격히 늘렸다. 북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세력은 급격히 팽창하고 로마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 사이에 또 다른 로마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와 그의 군대가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북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원로원의 훈령을 받아 급히 시칠리아에서 북상한 상황이었다.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 군과 연합하여 한니발을 조속히 격파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셈프로니우스가 집정관 임기 말기여서 빨리 군공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그냥 겨울을 싸움없이 버텨보자고 제안했다. 특히 스키피오는 갈리아인들은 변덕이 심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한니발과 갈리아족의 동맹이 와해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군공에 목말랐던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 군대와의 [[트레비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갈리아인 모두가 한니발의 편에 섰고 로마군은 북이탈리아에서 후퇴했다. 그나마 포 강에 있던 로마 식민지 플라켄티아와 크레모나는 종전까지 함락되지 않고 존속했다. 셈프로니우스는 트레비아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집정관 자리를 잃었다. 그는 로마로 귀국하여 집정관 선거를 주재한 후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되돌아갔다.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한니발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를 공격하러 떠났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실린 사족으로, 이때 한니발은 병사들이 해이해질 것을 우려해 무기 점검을 불시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들이 몇몇 발생하자 한니발은 이들을 모아두고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죽은 자가 먹을 필요는 없다."라고 야단치며 식량을 배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흘을 내리 굶어 다급해진 병사들은 동료의 것을 훔치려 들었는데, 동료 병사들은 자신의 것을 도둑맞지 않도록 잘 때도 아예 창과 검을 끌어안고 잤다. 그리고 굶은 병사 중에는 나이 어린 [[소년병]]도 끼어 있었는데, 한니발이 그 병사에게 "어쩌다 무기를 잃어버렸냐?"고 묻자 병사는 "평소에는 창을 안고 자는데, 눈보라가 심해서 막사로 들어가서 고향 생각을 하다가 그만 창을 잊어버렸다."라고 대답했고, 한니발은 "앞으로는 고향 생각을 할 때도 창을 안고 있으라."라고 말하며 무기고로 병사를 데려가 무기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무기고의 벽 한 쪽이 부서졌는데, 덕분에 무기를 분실한 병사들이 자기 무기를 발견하고는 찾아가서 급식을 받았다 한다. 애초부터 한니발이 순찰 중에 무기 관리를 소홀히 하는 병사들의 무기를 몰래 빼돌려서 병사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려고 이런 연극을 벌였던 것이다. 각설하고, 로마는 한니발을 막기 위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선출해 파병했다. 이 둘은 당시 원로원의 으뜸가는 인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플라미니우스는 북이탈리아와 로마를 잇는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건설했고, 원로원 의원들의 최종 영예인 [[감찰관]]까지 맡았었으며, 평민들의 지지까지 받는 인물이었다. 한니발은 이듬해 봄에 남하를 시작했다. 그러자 두 집정관은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로마 본토에서 물량을 앞세운 방어전을 계획했다. 따라서 둘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두 가도를 봉쇄한 채 대기했다. 자신이 지형상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한니발은 새로운 주둔지를 찾아 아르노 강 상류의 늪지대로 진군했다. 그런데 그 늪지대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역이 백여 킬로미터나 뻗은 험난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카르타고군은 휴식은 커녕 수면도 없이 3박 4일에 걸친 강행군을 했다. 지체하면 한니발의 행군이 로마군에 들통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군의 많은 병사들이 과로사하거나 풍토병에 시달렸고 한니발 본인도 눈병을 얻어 애꾸눈이 되었다.[* 다만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라는 로마 역사가는 해당 일화를 부정했다. 그는 한니발이 오른쪽 눈에 시력 손상을 입었으나 애꾸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어쨌든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은 성공적으로 [[늪지대]]를 통과하여 사흘의 휴식을 가졌다.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역사가들도 알프스 산맥의 유명함에 가려서 그렇지 실제 난이도는 오히려 이 늪지대 돌파가 더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곧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이 한니발을 추격해왔지만 역시나 한니발에게 패배했다. 플라미니우스는 처음에는 게미누스의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한니발과의 결전을 미루었다. 하지만 한니발이 지속적으로 약탈과 초토화 작전을 저지르자 초조함을 누르지 못하고 섣부르게 그를 공격했다. 결국 그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한니발의 매복에 걸려들어 참패했다. 무려 1만 5천이나 되는 병력이 한니발의 손에 궤멸당했다. 곧바로 플라미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로마군 기병 4천여 기가 증파되었지만 이들도 한니발에 의해 전멸당했다. 이는 로마군에 있어, 후일에 칸나이 전투에도 영향을 끼친 뼈아픈 손실이었다. 기세가 오른 한니발은 바로 남부 이탈리아를 향해 진격했다. 플라미니우스의 패배 소식을 들은 로마 정부는 놀라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파비우스]]를 [[독재관]]에 임명하여 파견했다. 그런데 파비우스는 [[파비우스 전략|한니발과의 결전을 피하며 소극적인 지구전으로 일관했다.]] 이는 하루빨리 한니발군을 일소하기를 바랐던 로마 원로원과 민중을 실망시켰다. 기병장 미누키우스는 "이 도망자 [[독재관]] 때문에 우리 [[로마군]]이 전장의 유랑자가 되었다."라며 아예 대놓고 파비우스를 비난했고, 이 일로 병사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에 파비우스의 친구들이 찾아와 충고했으나 파비우스는 "조국을 위하여 쓰는 수치는 수치가 아니며, 독재관인 내 어깨에 조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 한, 어떤 성급한 작전으로도 한니발을 기쁘게 만들 생각이 없다."라며 자신의 [[지구전|지구 전략]]을 고수했다. 결정적인 작전 실패도 파비우스의 신임에 큰 흠집을 냈다. 파비우스가 한니발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포위한 일이 있었다. 이는 한니발이 외지인의 안내를 잘못 알아듣고 카실리니움 계곡으로 들어간 기회를 파비우스가 놓치지 않고 잡아낸 결과였다. 파비우스는 결사대를 지휘해 카르타고군 1,000여 명을 사살하고 한니발의 군대를 계곡으로 더욱 몰아넣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형세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밤에 [[황소]] 2,000마리를 끌어와서 뿔에 짚을 매단 채 불을 붙이고 로마군 진영으로 몰았다. 이로 인해 로마군의 포위망은 와해되었고 한니발군은 탈출했다. 위의 사건으로 파비우스는 로마 정부와 시민들의 신임을 잃었다. 그는 독재관 임기도 연장받지 못 했다. 거기다 파비우스의 신임은 한니발의 계책으로 더욱 추락했다. 한니발은 로마 근방을 공격하면서도 파비우스의 농장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파비우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로마를 내부에서 분열시키려고 한 수작이었다. 한니발의 계책은 성공해서 파비우스는 전쟁보다 자신의 영지 보호에 힘쓴다는 누명을 썼다. 그래서 원로원은 다음 해에 선출될 집정관들에게 한니발과의 싸움을 맡기기로 했다. 그동안 한니발은 중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인 칸나이를 점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